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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에서 1년동안 프리랜서로 살기. (2부)-Street Spirit.

Newyork

by 뇩커어 2020. 12. 13. 2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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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전 이맘때, 겨울이 오기전, 패션회사를 그만두고, 길거리로 뛰쳐나왔다.

이 땐, 이렇게 뉴욕에서 40살을 맞이 할줄은 전혀 몰랐지.

 

우연히 알게 된 푸드트럭 비즈니스를 보고, 매력적이다! 라고 느낌적인 느낌을 느낀 후,

맨해튼 맨땅에서 푸드트럭을 시작하였다.

물론, 당연히 손님용(?) 요리를 해본 적도 없고, 영어로 소통이 가능하지도 않았어.

말그대로, 맨땅에 헤딩을 하였고, 아침마다 양파 24타 짜르기 (눈물질질짜며)를 연습하던...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9년이 지나 뒤돌아보니 추억은 사랑을 닮아...

 

웹페이지에도 가끔 실리기도 하며, 열정하나로 버티던 시절이었지.

장사는 쇼맨쉽이 필요하다.

서른살의 열정이었다. 9년전 뉴욕. 이 때는 모든 것이 새로운 나날들이었다.

지금은 한국에도 푸드 트럭이 많지만, 뉴욕에 처음 왔을 땐, 모든것이 신기하던 시절이라,

미국엔 이렇게 장사하는 방법도 있구나. 신기하다. 매력적이다. 그렇게 생각했어.

하지만, 맨땅에 맨손으로 시작하는 것은 쉽지 않았고, 다행히(?) 아주 열정적인 사장을 만나 시작하게 되었지.

 

"나는 영어보다 칼질을 먼저 배웠다."

 

배움의 순서가 어딨낭? 걍 새벽마다 양파 부터 썰고, 밥 짓고, 미드 타운 오고가는 뉴요커들에게 막 맥이기 시작했다.

오전 오후 저녁 타임을 나누어 하루종일 맨해튼 길거리에서 다운타운과 미드 타운을 오가며 장사를 해댔다.

물론 내 장사는 아니었고, 오너가 따로 있었지만, 내 꺼라는 생각으로 몸과 마음을 다해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새벽엔 직접 김치를 담그었다. 잘 모르지만, 하나 부터 열까지 인터넷을 보고, 모조리 흡수하여 실력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나름 김치 손님도 많았던 것 같다. 된장과 김치에 중독된 뉴요커들이 자주 찾아오기 시작했다. 어느덧 5~6개월이 지나고, 내 기억이 맞다면, 시작한지 6개월 정도 되었을때, 팔로워가 모두 합쳐 2000명은 되었던것 같다. 소통은 원할하지 않았지만, 당시에 페이스북과 트위터로 사장형이 기지를 발휘하여, 마케팅에는 성공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높아만 보였던 맨해튼도 사람사는 곳은 똑같다는것을 알 게 해준 추억이 되었다. 한국과 미국의 퓨전음식이라는 타이틀로, 치즈를 활용하여 음식을 자체개발하였는데, 카피와 복제라는 오명을 벗어나긴 힘들었고, 무엇보다 맨해튼의 주말 근성과, 날씨에 크게 휘청하는 장사를 오래끌어가기에는 열정과 집념 혹은, 실력만으로는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창 법적으로도 푸드트럭 규제가 시청에서 논의되는 시점이 있었고, 그에 대한 불안함과 매상에 대한 집착이 일을 즐기지 못하고, 일 그자체로 인식되게 하였고, 처음 느꼈던 매력도 매너리즘으로 차츰 치환되고 나서는 장사를 억지로 하게 되었다.

나름, 아쉬움이 컷지만, 결국 트럭에서 내리게 되었다.

 

"입맛 까다롭다던 뉴요커도 결국 배고픈 직장인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고,

나 역시, 요리와 푸드 비즈니스에 비전공자로서, 한계를 깨닫기 시작했다.

1년 반 정도를 겪고나서, 몸과 마음이 지쳐서, 외국인노동자의 한계를 절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장사든 사랑이든 남는 것이 있어야 한다. 현실은 동화가 없기 때문이다. 직장생활도, 아르바이트도, 그 이후로 크게 열정을 가지고 살지는 않았다. 9년이 지났지만, 30대에 제일 열심히 했던 것이 푸드 트럭임은 분명하다. 영어도, 뉴욕도, 그렇게 길위에서 배웠다. 

 

각종 아르바이트를 섭렵하며, 이곳 저곳 메뚜기 뛰고, 이사만 40여번을 넘게 한 듯 하다.

10년동안 내 집, 내 차 없이 살면서, 주위에서 한심하게 생각했지만, 남의 눈치를 보며 살지는 않았다.

어차피, 내 나라도 아니었고, 같은 한국사람이라도, 서로 다른 길을 걸으면,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기 쉽상이었다.

 

표면적이고, 겉저리에 불과한 인간관계에 환멸을 느낄 때도 많았지만, 상대방도 나를 보며, 같은 생각이었으리라.

다만, 서민들끼리, 싸우는 것은 피하고 싶어서, 그 흔한 "리셋"을 하기도, 당하기도 하며 인간관계를 정리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코로나로 인하여, 관계가 축소되거나, 사회적 관계가 어려워 졌다고 한다. 솔직히, 나는 코로나 이전에 이미, 정리하고 정리당하였다. 그런면에서 어찌 보면, 코로나를 핑계로 홀로 고독을 즐길 수 있었던 듯 하다. 때로는 복잡한 사회보다, 조용한 홀로 라이프가 내심 편한 걸 보면, 사회적거리는 물리적거리 뿐만 아니라, 심리적 거리감도 필요하지 않을까?

 

"나홀로 뉴욕"은 40부터라는 말이 있다. (내말이다.)

적당한 거리감은 관계를 분명 단단하게 한다. 그것이 리셋이건, 이별이건, 중요치않다."

 

다음 편에는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UberEATS" 관해서 주절거려보자.

 

UberEATS, NEWYORK,

푸드트럭 만큼 내 길거리 라이프를 진하게 만들어준 알바가 있었는데, "UberEATS"

올해 여름, 한국 뉴스에서 배달의 민족에 관한 뉴스가 많이 나왔어. 알고리즘을 베껴서 한국에 비슷한 비즈니스를 출시한 것은 좋았으나, 기존 우버의 문제와, 악습까지 그대로 가져가버렸지. 요즘도 배민은 문제가 많은 것 같던데, 그 역시 우버 회사의 문제해결과정을 답습하는 수 밖에는 없을거야. 시작이 곧 끝을 결정지어버린거지. 뭐 개인적인 생각일 뿐이고, 비즈니스는 어르신들이 하는 것이고, 다음 편에는 개인적인 철학? 뭐 그런걸 수다 떨어보겠어.

 

길위에서, 길거리노마드, 뉴욕은 여전히 New?, 발로배우는 영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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